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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꼬꼬무 아웅산 폭탄테러 전두환 암살 미얀마 범인 근황 실제사건 정보 정리

by 1분만에알려드림 2021. 7. 8.

 

꼬꼬무2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 모든 정보 정리

사건 기본 정보

1983년 10월 9일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의 암살을 시도 했던 북한의 폭탄 테러 사건.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건을 버마 아웅산 암살폭발 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전두환의 미얀마 방분

1970~80년대는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제3세계 외교전이 아주 치열하게 전개되던 때이다. 서로 상대방 국가와 단교하고 자기들과 수교 하기를 요구하기 바쁘기도 하면서, 돈을 끌어다 온갖 선물 공세를 하기도 한다. 국제사회에서 각자 나라의 외교적인 정통성과 국격, 위세를 인정 받고자 그야말로 소리없는 공방전이 매일 이어졌다. 특히 70년대 중반으로 대한민국은 점차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우위에 서기 시작하고. 이때 미얀마는 제2세계 비동맹 국가였다.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국가였끼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회주의와 비슷한 체제인 북한과는 대한민국 보다 긍정적인 외교 자세를 보인게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일정 시점부터는 대한민국 과의 관계에 개선에 많은 노력을 보였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미얀마를 대한민국과 우호적 국가로 확실하게 하고자 1983년 가을 예정된 동남아.대양주 수방에 미얀마를 가장 먼저 순방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떠나기 전부터 미얀마의 약한 군력과 군사독재의 특성을 고려하여 반대하는 주장도 강했고, 또한 북한에 의한 암살 및 테러 위협도 걱정거리 중 하나였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 노신영과 외무부 장관 이범석등 세계 정세에 바싹한 외교 관료 출신 핵심 참모들이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고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고립시키려는 목적이 강했다. 이내 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해 핵심 참모들은 김포국제공항을 떠나 미얀마로 향한다.

테러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순방 이틀 째인 10월 9일..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묘소를 방문하고 참배하는것. 이는 미얀마를 방문하는 해외 주요 인사들은 모두 하는 의례행사이다. 한국을 방문한 해외 정상들이 국립서울현충원에 방문 하는것과 같다. 그 행사를 위해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먼저 목적지에도착한다. 이후 이계철 주 미안먀 대사,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등 인원들은 10시 10분 아웅산 묘소로 출발하여 서석준 부총리 등 일행들과 최종 합류하기로 약속 되어있었고, 도로 사정을 잘 아는 이 대사가 탑승한 차가 가장 앞에서 안내를 시작했다.

사망자

대한민국 (17명) : 서석준, 이범석, 김동휘, 서상철, 함병춘, 이계철, 김재익, 하동선, 이기욱, 강인희, 김용한, 심상우, 민병석, 이재관, 이중현, 정태진, 한경희

 

미얀마 (7명) : 처음엔 4명 이었으나 테러리스트 검거 작전중에 추가로 3명이 사망한다.

 

북한 (1명) : 공작원은 총 3명으로 알려졌다. 신기철 상위는 체포과정에서 사살되고, 2명은 체포된다. 국가원수 및 우방국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을 경우 사형에 처해지는 미얀마의 형법에 의해 김진수는 1984년 사형.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한 점을 참작하여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25년간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 이후 2008년 5월 18일 중증 간질환으로 옥사.

 

 

*생전 강씨는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2007년 말 북한-미얀마 간의 외교가 수복되자 기대를 가지지만..북한은 강씨가 자국민이 아니라며 송환을 거부했다. 이에 대한 북한에 입장은 여전히 “독재자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제거하려던 남조선 인민 스스로의 의거이지 북한이 개입한 게 아니다” 라는 괴변을 하고있다.

전두환이 무사했던 이유

전두환을 노린 테러였지만 전두환은 살아남았다. 왜냐, 천운이 따랐다고 밖에 볼수가 없을 많은 이유가 겹쳤다. 본 일정에 따르면 10월 9일 오전 10시 15분에 미얀마 외무장관이 전두환 대통령 숙소에 찾아와 20분 경 묘소로 출발해야 했으나, 영빈관으로 향하던 외무장관의 차가 운행중에 고장이나게 된다. 당시 미얀마는 60년대 한국의 교통수준이라 택시를 잡는일이 쉬운일 아니였다. 당연하게도 약속시간은 지킬수가 없었고 지각은 불가피해졌다. 당시 먼저 묘소에 도착했던 함병춘 실장의 머리도 전두환 처럼 대머리 였기에 테러범들이 잘못 보고 착각을 했을수도 있고, 자연스레 비서실장이 도착한걸 보고 당연히 전두환도 도착했을거라 생각하고 테러를 진행한것 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지혼 나팔 소리에 맞춰 테러를 진행하기로 맞추었기 떄문에, 전두환이 도착전 예행연습으로 불렀던 나팔소리에 곧바로 테러를 진행했다고 볼수도 있다. 그야말로 스케줄 지연과 여러가지 교통문제로 전두환이 살아남은것이다. 또한 나팔이 울리지 않았다면 사건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는것.

정리하자면 

-당시 외무장관 탑승 차량고장, 개발도상국 미얀마의 특성상 택시를 잡기 힘들었고, 스케줄이 계속해서 딜레이

-미리 목적지에 있던 한국 대사가 전두환의 외모와 비슷했고, 비서실장이 전두환 보다 미리 도착, 나팔수들이 전두환이 도착했다 오인하여 진혼곡 연주를 하고, 나팔소리에 맞춰 폭탄을 터트린 테리범들이 목표물인 전두환이 오기전 테러가 진행됨

사건이후

전두환은 순방 일정을 전면 중단하고 서울로 곧바로 귀국했따. 인도, 스리랑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방문은 자연스레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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